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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칼럼

원칙 허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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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채은 등록일 07-02-02 00:00 조회수 6,490 영역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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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칙 허물기>

    유사랑(시사 평론가)

    일상은 내게 순간순간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 대해 소소한 선택을 강요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미리 정해둔 내 나름의 원칙을 들이댄다. 등교하는 아이를 승용차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는 일에 나는 과민할 정도로 인색했다. 특수한 상황, 예컨대 몸이 아프다거나 극도의 악천후가 아닌 경우라면 등교는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내 나름의 원칙이었다. 그동안 편하게 등교하고 싶어 꾀부리는 아이를 그런 내 원칙에 충실하여 억지로 등을 떠민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사실 이런 내 원칙이 아이의 자립심을 키워주겠다는 교육적 차원의 배려인지, 귀찮은 선례(?)를 미리 막아두자는 핑계인지 나 자신도 헷갈릴 때가 많지만, 아무튼 나는 아이 등교문제에서 만큼은 고집스레 내 원칙을 앞세우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겠다며 인사하고 나선 아이가 20여분 후쯤 헐레벌떡 되돌아 왔다. 반 친구라는 아이까지 대동하고서. 기다리던 버스가 정거장을 그냥 통과해버렸단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다가는 꼼짝 없이 지각할 판이니 학교까지 태워다 달라는 것이다. 아이는 이번만은 피치 못할 특수상황임을 간곡한 눈빛으로 주장했다. 더욱이 반 친구 앞인데 자기 체면도 좀 세워 달라며 은근히 나를 압박했다.
    원칙과 부자간의 인정 사이에서 나는 잠시 갈등했지만, 곧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용돈은 이럴 때 쓰라고 주는 거 아니냐? 늦더라도 다음 버스를 기다리거나 정 급하면 택시를 이용하라고 야멸치게 아이를 돌려 세웠다.

    그날 이후 아이는 나만 보면 입을 꾹 다문 채 외면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장난을 걸어 보기도 했지만, 아이는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와의 냉전이 길어지던 어느 날,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특수한 상황이니 태워주겠다는 내 제의를 아이는 단호하게 뿌리치고 그 빗속에 버스로 등교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어쩌면 부자간의 고집이 저리 똑같냐는 마누라의 핀잔 탓일까? 공연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제는 내가 삐질 차례라는 양, 부러 입을 꾹 다문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오후쯤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날아들었다.

    “ㅎㅎ아빠, 뿔났삼? 이젠 내맘 알겠삼?
    우리 이제 비긴거욤ㅋㅋ”

    결국 그날 이후 나의 원칙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전혀 특수한 상황이 아닌 날에도 아주 가끔씩 공부에 찌든 아이를 위해 기꺼이 기사노릇을 하곤 하니까.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학교 정문 앞 교통을 마비시키는 ‘자녀등교전용 승용차(?)들’과 어김없이 맞닥뜨리곤 한다. 예전 같으면 과잉보호라며 혀를 끌끌 찼을 터이지만, 이제는 그들도 나처럼 원칙을 지키려다 포기한 부모일 뿐이라는 걸 이해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분명 내가 진일보한 것임에 틀림없으렷다?

    * 유사랑 프로필
    - 인하대학교 교육학 석사
    - 문화일보, 서울경제신문, 중앙일보 등 주요일간지에 시사 평론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