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대상의 온라인그루밍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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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4-12-11 17:31 조회수 599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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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여성학 전공
“그루밍 성폭력”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뒤 이를 이용해 성적으로 학대 및 착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 “온라인 그루밍”이란 그루밍의 과정이 실제 만남 없이 디지털 기술과 온라인 공간을 활용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출처: 찾기 쉬운 생활법령정보 - 디지털성범죄 - 성착취 목적의 대화] |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대개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상상하면 흔히 떠올리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혼자 방안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잔뜩 웅크린 채로 앉아 문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고통과 슬픔에 잠겨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모습, 억압적인 가해자를 공포스러워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순수한 피해자의 모습들이 그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성폭력 관련 뉴스 기사들의 삽화에는 어둡고 침울한 이런 이미지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피해자들의 모습은 기사의 삽화나 여러분의 상상 속 모습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모두 각자의 다른 상황과 맥락, 성향과 특성들을 가진 고유한 개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온라인그루밍 피해 경험을 가진 청소년들은 어떨까요? 멀리서 보면, 한두 마디만 나눠보면 바로 티가 날까요? 그들의 행동만 봐도 맞출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019년에 여성가족부에서 전국 중고등학생 6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매매 실태조사(각주)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온라인공간에서 원치 않은 성적 유인 피해 경험” 비율은 전체의 11.1%를 차지했습니다. 이 중 “만남 유인 피해까지 경험”한 비율은 전체의 2.7%에 달했습니다. 절대로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렇게 피해경험을 한 청소년들이 많은데 우리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당연하게도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행동 양상만으로는 어떤 경험을 가졌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라인그루밍 피해자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온라인그루밍의 특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온라인그루밍의 특성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 가해자는 익명성을 활용하여 피해자에게 쉽게 접근하고, 청소년의 인정욕구를 자극하고 충족시키면서, 경계심을 흩트리고, 아주 사소한 요구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학대와 착취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이 관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오인하여, 피해를 인지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피해의 발견과 신고를 늦추거나 어렵게 만듭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온라인공간에서의 사회적 관계맺기에 익숙합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플랫폼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해졌고, 자신이 운영하는 채널이나 계정의 팔로워 수는 단순히 “인기”의 많고 적음을 넘어 사회적 성취의 바로미터로 여깁니다. SNS 계정의 팔로워나 구독자를 늘리는 것이 일종의 당연한 과업처럼 여겨지고, 게시물, 댓글, 채팅으로 연결된 타인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사회적 관계에 필수 요소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여기서 온라인그루밍 가해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정욕구를 교묘하게 공략합니다.
가해자들은 다양한 플랫폼을 넘나들면서 한꺼번에 다수의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손쉽게 접근합니다. 자신의 실제 개인정보를 가린 채, 이질감 없는 모습으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 “멋지다”, “예쁘다”와 같이 무겁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호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올린 게시물에 대한 칭찬과 긍정적인 피드백은 항상 기다려지고, 기분을 좋게 합니다. 온라인에서의 교류는 시간과 장소, 비용, 외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칭찬 메시지와 게시물에 대한 반응(댓글, 좋아요), 계정 팔로우만으로도 상대방의 호감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의 호의적인 반응을 상호 간에 정서적인 교류라고 이해하게 되면 경계심이 흐려지고, 방어력이 낮아집니다.
이때부터 가해자들은 사소한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조금만 더 밝게 웃으면 예쁘겠다” 같은 식입니다. 나를 위한 애정이 어린 조언처럼 가장합니다. 또 “네 가방에 달린 키링 사진을 보내줘” 정도로 별것 아닌 것들을 요구합니다. 하찮은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 줘”라거나, “00(신체의 특정 부위)을 찍어서 보내줘”라는 식의 요구를 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요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느끼면서 응답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주저하거나 거절하려고 할 때 강압적으로 돌변하여 지금까지 자신과의 관계와 주고받은 내용들을 빌미로 협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피해자가 느끼는 부담감과 불편함에 공감하며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기도 하고, 변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회유하고 그것이 성공하면 칭찬과 선물을 제공하여 착취적인 관계를 공고히 합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와의 관계를 우정이나 애정관계로 오인하기 쉽습니다. 가해자가 노골적으로 강압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치 피해자 스스로 이 관계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참여한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서 가해자에게 전송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잘못과 책임이라 생각하고, 피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온라인그루밍은 주로 SNS와 일대일 채팅에서 지속되기 때문에 주변에서 먼저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또 스스로도 피해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당황하는 사이 완전히 고립되어 가해자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거나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다른 피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온라인그루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오프라인으로 활동반경을 이동하지 않는 한 가해자는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주로 문자/텍스트로, 목소리로 등장하는 정도입니다. 그에 반해 피해자는 훨씬 눈에 띄고, 전면에 드러납니다. 이 때문에 얼핏 자유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강요받거나 위협받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에 거리낌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종종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일탈을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생각해 보았던 “흔히 기대되는 피해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모두 자신의 고유성을 가진 개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거부하거나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를 이용해 가해자가 피해자를 착취했다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뿐 아니라 우리들의 취약한 지점을 공략합니다. 바로 피해자를 의심하고, 모든 것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게 하는 가해자의 의도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