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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③편 - 저도 저를 사랑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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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예슬(상담팀) 등록일 22-12-05 13:37 조회수 1,046 영역 정신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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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
  • 안병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약력 :
  • 행복한우리동네의원 원장
    수원시자살예방센터 센터장
    협동조합 행복농장 이사장
    사단법인 세계의심장 상임이사
  • 자녀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 3편. 자해

    저도 저를 사랑하고 싶어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철학자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앓고 있는 고유한 질병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질병이라기보다 아픔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떤 고유의 아픔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 아픔을 또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바로 자해입니다. 여기서 ‘자해’라는 용어는 DSM-5(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의하면 ‘비자살성 자해(nonsuicidal self-injury)’를 가리킵니다. 즉, 죽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자기 상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해를 단순히 정신병리적 증상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해 행동은 아픔의 근원적인 표현 형태이며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한병철은 또 다른 책 『타자의 추방』에서 자기 상해를 존재감의 결여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았습니다.

     

     

    자기 상해, 이른바 생채기의 근원인 자존감의 결핍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충족의 위기를 보여준다.

    자존감은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타자를, 충족을 제공해주는 기관으로서의 타자를 필요로 한다.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고 있다.

    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청소년의 삶은 경쟁 그 자체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또래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해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기 처벌적 의식이자 사랑받고 싶다는 외침입니다. 이런 내용은 DSM-5의 ‘비자살성 자해’의 연구진단기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자신을 벌한’ 아이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비판은 고통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에만 맡길 때, 우리는 고통이 기호로서 갖는 성질을 놓치게 된다.

    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한병철의 말처럼 자해는 청소년의 힘든 삶과 그들의 아픔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진 아픔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나 자해하는 아이를 도울 때 여러 방해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해에 대한 오해입니다. 자해하는 사람은 자살하려는 것이다,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동이다, 과거에 성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했다,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 등등. 이 밖에도 많지만, 이는 모두 아이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오해입니다.

     

       둘째는 자해하는 아이를 만날 때 겪는 감정입니다. 잊고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고, 혹시라도 실수해서 아이가 더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해답이 없는 어려운 주제를 대할 때 오는 좌절감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이가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반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무시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면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주변 사람들의 반응 중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의지가 약해서 그래. 너보다 힘든 사람도 많아.”

    “왜 엄마(아빠)를 힘들게 하니?”

    “죽고 싶으면 죽지 왜 그런 짓을 해?”

     

     

       이런 말들은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듣는 아이들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바로 수용하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해지는 다른 방법을 같이 찾아보지 않을래? 그 다음에 자해를 멈출지, 줄일지 생각해보자.”

    “하고 싶을 땐 해도 되는데, 엄마는 속상하다.”

    “왜 하는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조금만 하면 좋겠어.”


     

       말의 내용보다는 전달하는 뉘앙스가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크게 위로받습니다.

        자해는 절망에 다다른 청소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방식입니다. 자해하는 아이를 만나면 매우 당황스럽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들어주고, 그 아픔을 함께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