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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①편 - 아이와 죽음을 이야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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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예슬(상담팀) 등록일 22-12-05 13:12 조회수 1,050 영역 정신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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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
  • 안병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약력 :
  • 행복한우리동네의원 원장
    수원시자살예방센터 센터장
    협동조합 행복농장 이사장
    사단법인 세계의심장 상임이사
  •  

    자녀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 1편. 죽음

    아이와 죽음을 이야기하라

     

     

     

       저는 어린 시절 주의가 산만한 아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제 입에 빨래집게를 물려줄 정도였습니다. 제가 제 앞가림도 못할 줄 알았는지 훗날 성인이 되어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예상과 달리 제가 잘 자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저는 문득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이를 ‘실존적 자각’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때 느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누군가와 나누지 못하고 혼자 괴로워하다가 그대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고민이 제 삶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무섭긴 하지만 한번 사는 인생, 이왕이면 잘 살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싶은 무의식적 소망이 의사로 만든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말처럼, 저는 정말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진료실에서 죽음과 관련해 아파하는 청소년을 많이 만납니다. 이들을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보면 자살사고를 보이는 아이, 자해하는 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경험이 있는 아이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죽음에 대한 이슈를 가진 아이를 만나면 치료자는 진단과 처방을 내리기에 급급합니다. 한 예로 제가 진료하고 있던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학교 상담 선생님이 저보고 자살사고가 늘었다고 의사 선생님한테 가서 약을 더 달라고 말하래요.

    저는 베란다 문을 열고 그 앞에 서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 전날 베란다에 서서 ‘이렇게 사는 게 맞나?’하고 고민했고, 그 얘기를 했더니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온 거예요."

     

     

       베란다에 서서 삶을 고민하던 아이의 행동이 과연 자살사고가 늘었다는 증거가 될까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같다고 봐도 될까요? 이러한 생각은 자살사고가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고민입니다. 이 고민은 너무 쉽게 ‘자살사고’라는 개념으로 병리화 되고, 아이는 정신과적 증상을 가진 환자가 됩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 등의 저서 『전문가들의 사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사회 비판의 주된 방향이 또 다른 전문가 주의나 더 철저한 전문가 주의를 지지하는 데서 벗어나 전문가들에 대해 회의하고 계도하는 태도-특히 전문가들이 여전히 주제넘게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한 말이다-로 바뀌지 않는다면 기술 전체주의로의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 외, 전문가들의 사회, 사월의책, 2015

     

     

      전문가에게 의존하고 개념화하다 보면 건강한 고민마저도 병리화 됩니다. 자살이라는 주제가 반드시 정신의학 영역 국한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첫째, 죽음은 무엇일까? 아이가 죽고 싶다고 할 때의 죽음과 우리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죽음은 같은 것일까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뿐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죽지 말라”고 합니다. 설득하기 전에 먼저 아이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둘째, 삶은 무엇일까? 아이들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삶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이 죽고 싶다고 할 때 그 말은 결국 ‘이렇게 살기 싫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삶이 어떤지, 왜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것인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왜 죽음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몇 달 전, A시에서 시민 강좌 요청을 받았습니다. 강좌의 제목을 ‘죽음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로 정해서 강의안을 보냈더니 담당자가 다른 제목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너무 무섭다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두렵다는 이유로 삶에서 죽음을 몰아냅니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입 밖에 꺼내선 안 되는 주제입니다. 죽음처럼 금기시된 또 하나의 주제는 성(性)이었습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성을 둘러싼 사회적 억압과 개인적 수준에서의 억압 역시 예전처럼 엄격하거나 엄청나지 않다. 분명 죽어가는 사람, 죽음과 공개적이고도 더욱 느슨해진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항은 성의 경우보다 훨씬 클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2018

     

     

      과거에는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였지만, 이러한 금기가 왜곡된 지금은 포르노 그래피(Pornography)적 사회가 되었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터부시하고 금기시하다 보면, 결국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입니다. 이야기 나눠도 된다. 더 나아가 이야기 해야 한다.

     

      넷째, 아이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많은 사람이 질문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답은 ‘솔직하게 말하라.’입니다. 정답은 없으니 애써 답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저의 생각과 경험을 있는 그대로 들려줍니다. 종교인이라면 종교에서 말하는 죽음관을 얘기해도 됩니다. 단, 설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각자의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진료실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대다수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공개적으로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에요.

    그런데 생각보다 전혀 두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편했어요.”

     

     

      죽음을 생각하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는 아이가 있다면, 스스로가 죽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기를 바랍니다.